[지금, 여기]어허, 믿음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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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마무리됐다. 내란으로 촉발된 대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겨우 한 단계가 끝났을 뿐이다. 멀쩡한 ‘민주주의’와 ‘공화국’으로 향하는 길에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고 높다. 종교 개혁도 그중 한 가지다.
헌법 제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천명하고 있다. 천지신명 하늘님을 믿든, 하나님과 예수님을 섬기든, 단군 조상을 모시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지구가 6000년 전에 만들어졌다, XX 염색체를 지닌 인간 여성이 단성생식으로 XY 염색체의 인간 남성을 출산했다는 기적을 믿고 따르는 것도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기괴한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심지어 국가 제도를 통해 이를 강제하려는 것은 헌법에서 정한 종교의 자유를 벗어나는 일이다. 헌법에는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점이 분명히 기술돼 있다. 그런데 특정 종교, 구체적으로는 개신교가 이 선을 넘고 있다. 직접 정당을 결성해서 정치에 뛰어들고, 세속의 법과 제도에 일일이 간섭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교육과 복지 사업을 통해 국가의 공적 자원을 전유하려 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조인철 의원이 대표 발의했던 ‘혐오표현 금지법’이 철회된 것도 개신교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점차 극단화하고 있는 온라인상 차별·혐오 표현, 폭력 선동을 규제하자는 취지인데, 여기에 차별·폭력 금지 사유로 ‘성적 지향’이 포함된 것이 문제였다.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성경에는 현대인의 상식과 규범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많다.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일, 어린 자녀의 인신 공양, 일부다처제, 간통이나 신성모독죄를 저지르면 돌로 쳐 죽이는 것, 적의 경우 어린아이까지 몰살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아무리 신앙심 깊은 신자도 이를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되새김질하지 않는 돼지, 비늘·지느러미가 없는 바다생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삶의 환경과 규범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유독 동성애에 대해서만큼은 다르다. 성경의 가르침을 입맛대로 골라 쓰는 선별주의가 대단한 모순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세상이 원래 합리적 이성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는 있다. 다만 이러한 이해와 관용은 어디까지나 그런 믿음이 그들의 내면에 있을 때까지만이다.
마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동성애자의 악행이 그토록 걱정된다면 국회의원에게 항의 전화하고 온라인 게시판을 악플로 도배하고 거리에 나가 악을 쓰고 깃발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더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동성애자도 하나님이 창조했으니 아마 다 계획이 있으셨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면, 세속의 여론을 호도하는 댓글 작전을 벌이고 법원에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고 늘봄학교를 장악할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 더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조바심 때문에 그렇게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은가.
모든 기독교인이 극우 정치에 경도돼 있고 성소수자를 혐오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도 훌륭한 시민적 덕성을 갖추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다. 그런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제는 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참된 기독교인’의 해명조차 듣고 싶지 않다. 진정한 기독교 신자와 그렇지 않은 기독교 신자를 구분하는 수고를 왜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내가 해야 하나. 종교가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게 만든 책임은 종교 내부에 있으니, 믿음의 힘으로 스스로 개혁해주기를 그저 기대할 뿐이다.
헌법 제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천명하고 있다. 천지신명 하늘님을 믿든, 하나님과 예수님을 섬기든, 단군 조상을 모시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지구가 6000년 전에 만들어졌다, XX 염색체를 지닌 인간 여성이 단성생식으로 XY 염색체의 인간 남성을 출산했다는 기적을 믿고 따르는 것도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기괴한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심지어 국가 제도를 통해 이를 강제하려는 것은 헌법에서 정한 종교의 자유를 벗어나는 일이다. 헌법에는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점이 분명히 기술돼 있다. 그런데 특정 종교, 구체적으로는 개신교가 이 선을 넘고 있다. 직접 정당을 결성해서 정치에 뛰어들고, 세속의 법과 제도에 일일이 간섭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교육과 복지 사업을 통해 국가의 공적 자원을 전유하려 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조인철 의원이 대표 발의했던 ‘혐오표현 금지법’이 철회된 것도 개신교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점차 극단화하고 있는 온라인상 차별·혐오 표현, 폭력 선동을 규제하자는 취지인데, 여기에 차별·폭력 금지 사유로 ‘성적 지향’이 포함된 것이 문제였다.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성경에는 현대인의 상식과 규범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많다.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일, 어린 자녀의 인신 공양, 일부다처제, 간통이나 신성모독죄를 저지르면 돌로 쳐 죽이는 것, 적의 경우 어린아이까지 몰살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아무리 신앙심 깊은 신자도 이를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되새김질하지 않는 돼지, 비늘·지느러미가 없는 바다생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삶의 환경과 규범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유독 동성애에 대해서만큼은 다르다. 성경의 가르침을 입맛대로 골라 쓰는 선별주의가 대단한 모순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세상이 원래 합리적 이성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는 있다. 다만 이러한 이해와 관용은 어디까지나 그런 믿음이 그들의 내면에 있을 때까지만이다.
마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동성애자의 악행이 그토록 걱정된다면 국회의원에게 항의 전화하고 온라인 게시판을 악플로 도배하고 거리에 나가 악을 쓰고 깃발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더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동성애자도 하나님이 창조했으니 아마 다 계획이 있으셨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면, 세속의 여론을 호도하는 댓글 작전을 벌이고 법원에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고 늘봄학교를 장악할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 더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조바심 때문에 그렇게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은가.
모든 기독교인이 극우 정치에 경도돼 있고 성소수자를 혐오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도 훌륭한 시민적 덕성을 갖추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다. 그런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제는 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참된 기독교인’의 해명조차 듣고 싶지 않다. 진정한 기독교 신자와 그렇지 않은 기독교 신자를 구분하는 수고를 왜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내가 해야 하나. 종교가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게 만든 책임은 종교 내부에 있으니, 믿음의 힘으로 스스로 개혁해주기를 그저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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